배우 한 명이 스물세 명이 되는 밤, 웨스트엔드 <드라큘라>의 대담한 실험과 엇갈린 평가

- 원 출처
- WhatsOnStage
한 사람이 무대에 서서 스물세 명을 연기한다면 관객은 무엇을 보게 될까. 2026년 2월 4일 런던 웨스트엔드의 노엘 카워드 극장에서 막을 올린 <드라큘라>는 이 질문을 그대로 무대로 가져왔다. 신시아 에리보가 원작 소설 속 23개 캐릭터를 혼자 연기하고, 연출은 킵 윌리엄스가 맡았다.
공연은 5월 말까지 이어졌다. 라이브 연기와 영상이 섞인 이 실험은 평단의 평가가 엇갈렸고, 그 엇갈림 자체가 읽을 만한 이야기를 남겼다.
해외 무대의 형식 실험을 함께 읽어 보는 일은 우리 공연을 보는 눈을 넓혀 준다. 한 배우의 몸과 거대한 스크린이 맞붙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결과를 평단이 어떻게 읽었는지 따라가 본다.
01한 사람, 스물세 개의 얼굴
원작은 브램 스토커의 서간체 소설 <드라큘라>이다. 서간체란 편지와 일기, 기록 같은 글을 이어 붙여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다. 한 사건을 여러 인물이 각자의 목소리로 증언하는 구조이니, 무대에서는 이 목소리들을 어떻게 나눠 맡길 것인가가 처음부터 큰 문제였을 것이다.
이번 프로덕션은 그 문제에 가장 극단적인 답을 택했다. 목소리를 나누지 않고 한 배우에게 모두 맡긴 것이다.
흡혈귀부터 그를 쫓는 인물들까지 모든 역할을 한 사람이 번갈아 연기한다는 설정은 배우에게 엄청난 체력과 기량을 요구한다. 목소리와 몸짓, 표정을 순식간에 바꿔야 하고, 그 전환이 관객에게 또렷하게 읽혀야 하기 때문이다.
1인 다역은 연극에서 오래된 장치이다. 하지만 스물세 명이라는 규모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전환이 너무 빠르면 관객은 누가 누구인지 따라가기 어렵고, 너무 느리면 극의 속도가 떨어진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연출이 꺼내 든 도구가 영상이었다.
02라이브 연기와 영상이 섞인 무대
공연은 라이브 연기와 사전 녹화 영상을 섞은 혼합 형식이다. 무대에는 카메라가 놓이고 거대한 스크린이 함께 쓰인다. 공연 사진에서도 거대한 얼굴 영상 앞에 촛대가 놓인 테이블과 촬영 장치를 든 연출 장면이 보인다. 배우의 얼굴이 스크린에 크게 비치고, 그 영상이 무대 위의 라이브 연기와 겹쳐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구성이다.

이 형식이 노리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연극의 현장감과 영화의 클로즈업을 한 무대에서 동시에 얻는 것이다. 사전 녹화된 얼굴이 스크린에 있고 라이브의 몸이 그 앞에 서면, 혼자서도 여러 사람이 무대에 있는 듯한 인상을 만들 수 있다.
스물세 명을 한 명이 감당하려면 전환의 속도를 영상이 도와줘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박자의 문제도 따라붙는다. 사전 녹화 영상은 매 회 똑같이 흘러가지만 라이브 연기는 회마다 숨이 조금씩 달라지므로, 혼자 무대를 지키는 배우는 정해진 영상의 속도에 자기 몸을 맞추는 일까지 떠안게 된다.
한편 관객이 보는 것이 배우의 몸인지 화면의 이미지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이 모호함이 고딕 소설의 불안한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그래서 형식이 낯선 만큼 객석에서 어디를 보게 되는지가 공연 감상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스크린의 얼굴을 따라가다 보면 무대 위의 몸을 놓치고, 몸에 집중하면 화면의 정보가 흐려진다. 이 공연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03엇갈린 평가, 영상이 배우를 가렸을까
평가는 한쪽으로 모이지 않았다. Time Out은 2026년 2월 17일자 리뷰에서 별 세 개를 주었고, 영상 연출이 배우의 존재감을 가린다고 평했다. 리뷰의 표현은 Erivo is tiny and the screen is massive.
에리보는 작고 스크린은 거대하다는 뜻이다. 이 한 문장에 비판의 요점이 담겨 있다. 한 배우의 연기를 보러 갔는데 정작 무대에서는 화면이 압도한다는 것이다. 작다와 거대하다를 한 문장에 나란히 놓은 대비 자체가, 1인극의 주인공이 영상 앞에서 얼마나 작아 보였는지를 단번에 전한다.
London Theatre의 리뷰는 결론을 Not quite, 곧 아직 부족하다는 쪽으로 맺었고, 추천할 만한 공연으로는 보지 않았다. 이 리뷰는 별점을 따로 달지 않았다. 별 세 개를 준 Time Out이 그래도 일정한 점수를 인정한 평이었다면, London Theatre는 점수 대신 결론 한 줄로 아쉬움을 정리한 평이었다.

두 리뷰 모두 개인 평론가의 의견이지만, 다른 매체들의 평가도 엇갈렸다고 정리되는 만큼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리는 공연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 평가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두 가지를 같이 보면 좋다. 하나는 형식 실험이 곧바로 완성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도일수록 균형을 잡는 데 시간이 걸린다. 다른 하나는 불호의 이유가 실험의 방향이 아니라 균형에 있다는 점이다.
영상이 지나치게 앞서면 배우가 작아 보인다는 지적은, 영상과 배우의 비중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이지 영상을 쓰는 것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두 리뷰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것도 영상의 존재가 아니라 영상과 배우 사이의 저울이다.
관객 반응과 흥행 성적은 이 시점에 가늠할 근거가 없으니, 평론가의 평만으로 공연 전체를 판단하지는 말자. 후기를 읽을 때는 별점보다 어떤 장면에서 그렇게 느꼈는지를 적은 문장을 찾아보면 평가의 온도를 가늠하기 쉽다.
04원작의 구조가 무대에 던진 숙제
이번 공연이 왜 하필 1인 다역이었는지는 원작의 짜임새를 떠올리면 조금 더 이해가 된다. 서간체 소설에서 독자는 편지와 일기를 한 장씩 넘기며 인물마다 다른 말투와 시선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차분하게 사건을 기록한다.
그 목소리가 모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흩어진 증언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합쳐지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공포의 대상이 바깥의 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자라는 불안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해석이 연출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구조에서 1인 다역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상상해 보는 데는 도움이 된다.
원작을 읽지 않은 분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흡혈귀 이야기는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서 줄거리를 대략 아는 것만으로도 공연의 형식에 집중하기 쉽다. 오히려 줄거리를 아는 관객일수록 인물이 바뀌는 순간을 더 정확히 알아차린다.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안정감이 형식 실험을 즐기는 여유로 이어지는 셈이다.
05혜화동의 시선, 영상과 연극 사이에서
대학로에서도 영상은 낯선 도구가 아니다. 배경 영상, 라이브 카메라, 영상 속 인물과의 대화 같은 시도는 소극장 무대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래서 이 작품의 평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있다. 영상을 쓸 때 배우의 몸이 가장 강한 매체로 남아 있는지 묻게 되기 때문이다.

소극장은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 배우의 숨소리까지 전해지는 장점이 있으니, 영상을 쓰더라도 그 가까움을 덮지 않는 균형을 찾는 것이 과제이다.
이 작품이 보여 준 또 하나의 질문은 스타 배우 한 명에게 전적으로 기대는 구조의 위험과 매력이다. 성패가 배우의 역량에 달려 있는 만큼 잘 맞으면 놀라운 경험이 되지만, 반대로 형식이 배우를 압도하면 아쉬움이 커진다.
우리 공연계에서 1인극이나 2인극이 사랑받는 이유와 겹쳐 보면 더 흥미롭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인물을 연기하는 전통은 한국 연극에도 풍부하다.
웨스트엔드가 이런 실험을 올린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온다. 매 시즌 안전한 리바이벌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도전을 받아들이는 극장이 있다는 점은, 상업 극장도 새로운 무대 언어를 시험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르기보다, 이런 시도가 올라올 수 있는 극장 환경 자체를 부러워해도 좋다.
06비슷한 형식의 공연을 만난다면
영상이 크게 쓰이는 1인극을 보게 된다면 몇 가지를 눈여겨보자. 먼저 스크린과 배우 중 어디에 시선이 가는지 스스로 관찰해 보면 된다. 그 쏠림이 연출의 의도인지 우연인지 생각해 보면 형식을 읽는 눈이 생긴다. 다음으로 인물이 바뀌는 순간에 배우가 무엇으로 구분을 만드는지 보자. 목소리인지 자세인지 영상 속 분장인지에 따라 연기의 방식이 읽힌다.
고전을 새로 읽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스물세 명을 한 명에게 맡긴 이번 시도는 지나치게 과감했다는 평과 그 과감함 자체가 가치라는 평을 함께 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느 쪽이든 공연을 본 사람들이 형식에 대해 말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이 실험의 성과로 남는다.
- WhatsOnStage, 「West End shows set to open in 2026」, https://www.whatsonstage.com/news/west-end-shows-set-to-open-in-2026_1690881
- London Theatre, 「Dracula review」, https://www.londontheatre.co.uk/reviews/dracula-review-cynthia-erivo-kip-williams-bram-stoker
- Time Out, 「Review: Dracula starring Cynthia Erivo at the Noël Coward Theatre」, https://www.timeout.com/london/news/review-dracula-starring-cynthia-erivo-at-the-noel-coward-theatre-021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