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혜화동
홈/그린룸
그린룸
콜타임
홈/그린룸
그린룸
콜타임26.09.188분 읽기

무인도의 여섯 병사는 런던에서 어떻게 말할까, <여신님이 보고 계셔> 영어판이 걷는 길

영어판 런던 쇼케이스 소식에 실린 사진 · 사진 제공 연우무대, 아이러브스테이지 런던
원 출처
더뮤지컬

한국전쟁 중 무인도에 고립된 적대 진영의 병사 여섯 명이 있다. 서로를 경계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 서로를 보게 된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된다. 대학로에서 2013년 초연 이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이 창작뮤지컬이 이번에는 국내 무대가 아니라 런던에서 소식을 전했다.

2026년 10월 12일 런던 차링크로스 시어터에서 영어 버전 쇼케이스가 열렸고, 현지 배우 여섯 명의 캐스팅이 공개됐다.

분단이라는 아주 한국적인 소재가 영어로 번역되면 런던 관객에게도 닿을 수 있을까. 이 질문 하나가 이번 소식의 중심이다. 영어판이 어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국내에서 이 작품이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지를 알고 나면 이 소식이 훨씬 구체적으로 읽힌다.

01이번 쇼케이스가 말해 주는 것

이번 쇼케이스는 일반 관객에게 열린 공연이 아니라 업계 관계자를 초청한 비공개 산업 쇼케이스였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해외에 소개할 때 흔히 거치는 단계로, 완성된 공연을 선보이기보다 영어 대본과 음악이 얼마나 힘을 갖는지를 제작 관계자들에게 보여 주는 자리다.

그래서 이번 소식을 곧바로 런던 공연 개막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제작진이 밝힌 목표는 2027년 영국 본공연 개발이다.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은 영어 대본과 음악의 극적 맥락, 인물 관계, 감정선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일이다. 번역이라는 단어보다 개발이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국어 대사를 영어로 옮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어를 쓰는 관객이 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장면의 맥락과 인물의 마음을 다시 다듬는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장치가 말 한마디의 온도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어판 쇼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5년 11월 디 아더 팰리스에서 첫 쇼케이스가 열렸고, 이번 차링크로스 시어터 쇼케이스는 거의 1년 만에 이어진 그다음 단계에 해당한다. 한 번 보여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본과 음악을 고쳐 가며 거듭 다시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꽤 오래 호흡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2여섯 배우와 창작진

이번 쇼케이스 캐스팅은 석구 역에 조조 메러디스, 영범 역에 잰더 팽, 동현 역에 로렌스 모스먼, 여신 역에 클로이 사라코, 선호 역에 조 톰슨우바리, 주화 역에 잭 오프레시오다. 창섭 역은 캐스팅이 진행 중이다.

분위기 컷.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가의 섀프츠버리 애비뉴 거리, 작품 사진이 아니라 공연이 열린 도시의 풍경
분위기 컷.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가의 섀프츠버리 애비뉴 거리, 작품 사진이 아니라 공연이 열린 도시의 풍경 · Wikimedia Commons · The Lud · Public domain

여섯 병사가 한 섬에 고립돼 있다는 설정은 인물이 많지 않은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어판 캐스팅이 눈에 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어로는 말투와 사투리, 호칭으로 인물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왔을 장면을 영어에서는 배우의 연기와 음악으로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현지 배우들이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영어판 개발의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창작진도 보자. 영어판 연출은 브로나 라간이 맡았고, 음악감독은 콜름 오리건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참여한다. 콜름 오리건은 웨스트엔드 <북 오브 몰몬>의 음악감독으로 소개된다. 한 번 함께한 음악감독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지난 쇼케이스에서 만든 작업이 이번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제작은 연우무대의 유인수, 아이러브스테이지 런던의 김준영이 공동으로 진행한다. 한국 쪽 제작사와 런던 쪽 제작사가 함께 움직이는 구조여서, 한국 쪽 작품의 정서와 영국 쪽 시장의 감각이 한 팀 안에서 부딪히며 조율될 수 있다.

03이야기의 뼈대, 여신님이라는 거짓말

영어판이 무엇을 옮기려는지 알려면 원작의 뼈대를 알아 두는 편이 좋다. 무인도에 고립된 병사들 가운데에는 전쟁의 상처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를 안정시키려고 누군가 여신님이라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여신님은 실제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병사들이 함께 상상해 낸 존재다. 2024년 시즌을 소개한 기사도 남북한 병사가 여신님의 존재를 상상하며 서로 신뢰를 쌓아 가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거짓말이 갈등을 키우는 대신 관계를 잇는 끈이 된다는 점이다. 총을 겨누던 사람들이 같은 거짓말을 지키려고 한 팀이 되는 장면은,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국경을 넘어 소개될 때 번역이 어려운 사상이 아니라 번역이 쉬운 감정을 앞세울 수 있다.

영어판 제작진이 인물 관계와 감정선을 가장 먼저 손보고 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줄거리를 미리 아는 것보다 이 거짓말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시선을 두고 보면 좋다.

2024 여덟 번째 시즌 국내 공연 사진 1
2024 여덟 번째 시즌 국내 공연 사진 1 · 사진 제공 연우무대

04대학로에서 쌓아 온 시간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출발은 2011년 서울뮤지컬페스티벌 예그린앙코르다. 이 무대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이 2년 뒤 정식 초연으로 이어졌다. 페스티벌에서 먼저 검증을 받고 극장으로 옮겨 온 이력은 지금 런던에서 쇼케이스로 반응을 확인하는 방식과 닮았다. 이 작품은 늘 작은 자리에서 먼저 보여 주고, 반응을 확인한 뒤 다음 단계로 가는 길을 택해 왔다.

국내 시즌의 발자국은 이렇다. 2019년 여섯 번째 시즌은 서울 개막에 앞서 10월 25일과 26일 수원에서 먼저 관객을 만났고, 서울 공연은 11월 16일부터 2020년 3월 1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열렸다.

2024년 여덟 번째 시즌은 11월 26일부터 2025년 3월 3일까지 인터파크 유니플렉스 1관에서 공연했다. 이 시즌은 초연 이후 처음으로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은 배우들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2026년 아홉 번째 시즌은 11월 24일부터 2027년 3월 1일까지 NOL 유니플렉스 1관에서 이어진다.

시즌이 아홉 번이라는 것은 한 작품이 오랜 시간 같은 관객층과 새 관객을 번갈아 만나 왔다는 증거다. 시즌마다 극장의 이름이 인터파크에서 NOL로 바뀌어도 같은 극장 1관에서 다시 막이 올랐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 장소에서 반복해서 올릴 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 작품에 있었다는 뜻이다. 소개한 세 시즌이 모두 겨울에 개막해 이듬해 3월 초에 막을 내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추운 계절에 따뜻한 이야기를 찾는 관객이 이 작품의 단골이라고 읽을 수 있다.

2019년에는 서울 개막 전에 수원에서 먼저 관객을 만난 만큼, 대학로 바깥 관객까지 고려한 시즌도 있었다. 공개 오디션으로 새 얼굴을 맞이한 2024년 시즌은 이 작품이 안정된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배우진을 새로 채우려는 시도를 했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05혜화동의 시선: 수출의 다음 질문

혜화동이 보기에 이번 소식은 국내 흥행작이 영어권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딘 사례다. 국내에서 오랜 시간 검증을 받은 작품이 번역 단계를 거쳐 해외 관객 앞에 서려고 한다. 이때 가장 큰 질문은 번역된 말이 정서까지 데려갈 수 있느냐다.

2024 여덟 번째 시즌 국내 공연 사진 2
2024 여덟 번째 시즌 국내 공연 사진 2 · 사진 제공 연우무대

이 작품은 병사들이 서로를 적이 아닌 같은 사람으로 마주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서, 그 과정이 문화권을 넘어 통할 만큼 보편적인지를 시험받게 된다.

우리가 지켜볼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영어판이 원작의 어떤 부분을 지키고 어떤 부분을 다듬는지다.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배경 설명을 얼마나 덜어내거나 더하는지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

둘째는 쇼케이스 이후 어떤 형태로 본공연이 이어지는지다. 2027년은 목표 시점이니, 공식 발표가 나오면 그때 일정을 확인하면 된다.

06관객으로서 즐기는 법

국내 관객에게는 영어판 소식과 별개로 가까운 기회가 있다. 아홉 번째 시즌이 곧 대학로에서 막을 올리니 예매 오픈을 챙겨 두자. 아직 이 작품을 보지 못했다면, 런던 소식을 계기로 한국어 원작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순서다. 영어판이 나중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하는 재미는 원작을 본 사람만 누릴 수 있다.

이미 본 관객이라면 이번 시즌에서 한 가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영어로 바꿀 때 가장 어려울 장면이 어디일까. 여신님이라는 거짓말이 병사들 사이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번역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말의 온도가 어디에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보면 같은 공연도 훨씬 다르게 보인다. 영어판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 그 비교를 위한 기준점은 지금 대학로 무대에 서 있다.

영어판 소식을 더 따라가고 싶다면 확인할 순서도 정해 두면 편하다. 먼저 남은 한 자리인 창섭 역의 캐스팅 발표를 기다려 보자. 이 역이 채워져야 영어판의 얼굴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제작사가 밝히는 영국 본공연 일정을 살펴보자.

개발 단계의 목표가 확정 일정으로 바뀌는 순간이 이 프로젝트의 진짜 분기점이다. 그 사이에 대학로에서 먼저 시즌을 만나 두면, 소식이 나올 때마다 훨씬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다.

참고한 자료
다음 글 · 콜타임칼끝이 닿기 전의 침묵을 무대로: 극단 소년이 창단 10주년에 꺼낸 펜싱 연극 <투셰> →

그린룸의 다른 글

전체 →
콜타임객석이 곧 고백의 청자가 되는 90분, 1인극 <전락>이 10월 대학로에서 다시 열린다콜타임객석의 누군가가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밤,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 네 번째 시즌콜타임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기억이 움직인다: 세 번째 시즌을 맞은 무언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